서휘조는 중산왕 서달의 장자인데 세습으로 위국공(魏国公)으로 봉해 졌습니다. 주원장이 죽은후 건문제 (建文帝)를 도와 북경을 보호하는 일을 책임지었습니다. 주예(朱棣)가 대군을 이끌고 남경에 쳐들어오자 서휘조는 체포되였습니다. 건문4년(1402)에1월13일, 당시 조정의 무신(武臣)은 모두 주예에게 귀순하였는바 오로지 서휘조만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주예는 친히 만나 보고 마음을 사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후 법사(法司)쪽에서 억지로 권하였는데 서휘조는 태연하게 펜을 들고 그저 “우리 아버지는 개국 공신인바 자손들은 죽음을 면한다”라고 썼습니다. 주예는 대노하여 서휘조의 세습관직을 박탈하고 집에 가두었습니다. 영락5년(1407)에 서휘조는 40세를 일기로 우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명성조 주예의 부인 인효(仁孝)황후는 서달의 장녀였습니다. 휘조가 면직당한후 인효(仁孝)황후는 집안 사정을 돌보라고 진회남안의 성동(城东) 땅을 주었습니다. 정덕3년(1508), 서달의 6세손 서천측(徐天赐)이 이 땅에 웅위롭고 장려한 동원(东园)을 지었는데 소봉산(小蓬山)이라고도 하며 금능의 여러원중에서 손에 꼽힙니다. 명이 멸망한후 동원도 훼손되었으며 그 유적이 백로주공원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