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재와 야연도

【옛 舗:크다  작은
한희재는 북방귀족이었는데 아버지께서 후당(后唐) 황제 이사원의 멸족으로 남당(南唐) 에 의탁하여 장간리(长干里)동남쪽의 척가산(戚家山)에 거주하였습니다. 후인이 이 인재에 대한 요해는 다수가 고금 유명한《한희재야연도》(韩熙载夜宴图)에서였습니다.대손손 반할 사람이구나”라는 것입니다.
한희재는 선후로 중서서랑(中书侍郎),광정전학사(光政殿学士)였습니다. 후주 이옥(李煜)은 그의 재간을 흠상하나 중원을 통일하자는 정치주장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희재는 이옥이 가슴에 품은 포부가 크지않다고 여겼으며 또 남당 조중에 권력다툼이 심한것을 보고 한껏 노는 방법으로 세상사람을 미혹시키고 자신을 보호하는수 박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벌써 이옥은 술이나 색에 빠졌다고 여겼으나 이옥은 우려가 되어 저명한 화가 고홍중(顾闳中)을 한씨집에 보내어 정황을 탐찰하게 하였습니다. 고씨가 한씨집에 가보니 한희재는 처첩을 끼여안고 가녀(歌女)들과 술을 마시면서 즐기었습니다. 야연이 끝나고 돌어온후 고홍중은 머라속에 기억해둔 당시의 환경과 인물표정,모습 등을 그림《한희재야연도》로 그려 이옥에게 드렸습니다. 이 그림을 본 이옥은 한희재가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내심속을 감추고 있으나 눈섭 사이로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한희재를 도읍에서 내쫓기로 하였습니다. 후에 한희재의 애걸복걸하에 그만뒀습니다. 한희재는 이 일로 얼마후에 병으로 죽었으며 죽은 다음“우부사동평장사”(右仆射同平章事)로 봉하게 되었고 시호(谥)를 “문경”(文靖)이라 하게 되였으며. 저작으로는《의의집》(拟议集)、《정거집》(定居集)등을 남겼습니다. 그는 북쪽을 유람한 후 지은 시《감회》에: “저는 강북인이었는데 지금은 강남객이 되었다. 다시 강북을 거니니 아는 얼굴이라고는 없구나. 바람에 추운데 가을 밤의 달은 누구를 위해 고백하느냐. 돌아가는 것이 더 좋겠구나, 강남에는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노라”라고 썼습니다. 지금 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한희재야연도》는 송나라의 모조본인바 그림속의 옷이랑 인물, 술잔과 등잔, 휘장이랑 악기등은 모두가 남당을 연구하는 진귀한 역사재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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