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과 봉황대

【옛 舗:크다  작은
당나라 대시인 이백은 개원(开元)13년(725)부터 상원(上元)2년(761)까지 7차례에 걸쳐 금능에 주숙하엿는바 10리진회라는 육조명승에 반하여 늘 여기를 거닐면서 많은 시구를 남겼습니다. 이백은《장간행》(长干行)에 “랑군은 죽말을 타고 와서 침대를 애돌며 청매 (青梅)로 애태운다”, “장간리(长干里)에 같이 살면서 두 어린이사이는 서로 모르는것이 없다.”라는 미속풍습을 나타내는 시구로 사람들의 간장을 녹였습니다. “청매죽마”(青梅竹马)와 “양소무채”(两小无猜)라는 성구는 지금까지도 어린이시절의 즐거음을 말하여 흔히 쓰입니다. 소장간(小长干)서쪽의 와간각(瓦官阁), 봉황대, 그리고 손촉누(孙楚楼)등은 당송시기에 여전히 이름있는 강을 낀 풍경구로 이백이 이 일대에서 좋은 문장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오언시와 칠언시《금능 봉황대에 올라》(登金陵凤凰台)는 진회의 풍경을 노래하였을 뿐아니라 또 이씨를 쓰게 되는 옛 이야기가 어려있습니다. 그것인즉: 이백이 무한(武汉)에 놀러 갔을적에 이 시구를 읊으려 하였으나 최호(崔颢)의 《황학누》(黄鹤楼)가 너무 이름 있어 그만두고 금능에 와서《봉황대》를 읊었는데 과연히 천년이라는 시간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애송가로 되었습니다. 이 시구는 후인들의 고시 내용 으로 되었습니다. 모택동은 손으로 이 시를 베껴 적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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