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휘지와 요적보

【옛 舗:크다  작은
왕휘지는 동진 왕씨 귀족출신으로 저명한 문학가이고 서예가입니다. 어느 날 왕희지는 배를 타고 건강도읍에 발을 멈추고 진회풍경을 구경하노라 강뚝에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알아본즉 주인이 환이(桓伊)이었습니다. 환이는 관환출신에다 비수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영수현후”(永修县侯)로 봉하였으며 심지어 호를 “우군”(右军)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을 즐기어 강남제일로, 채읍 가정적(蔡邕柯亭笛)을 소장해 두어 늘 혼자 불었습니다. 왕휘지는 환이가 피리를 즐겨 분다는 것을 알고 모르는 사아이지만 사람을 파견하여 한소절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환이는 직위가 아주 높았으나 왕휘지의 재간을 존중하여 차에서 내려 가정적을 꺼내어《매화삼농》(梅花三弄)을 부른 다음 차에 올라 자리를 떠났습니다. 두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그 뜻이 피리속에 있었는바 후세사람들의 미담이 되었습니다. 후세사람들은 이 나루터를 “요적보”라 하였는데 그 자리인즉 지금의 동수관 서쪽입니다. 청나라 사람 어회(余怀)는 :“언제 정이 그렇게도 깊었느냐, 침대 석자에서도 정이 흘러 넘치누나. 오늘밤 진회강의 강물이, 피리 소리에 파도를 일으키네.”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청나라 동치년간, 문인 설시우(薛时雨)는 이를 이야기로“정전청적”(停艇听笛)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명말 청초시기 진회근처 술집의 유명한 간판으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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