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지와 와관사

【옛 舗:크다  작은
고개지는 동진시기 걸출한 화가이며 육탐미(陆探微), 장승요(张僧繇)와 함께 화단의 삼걸로 불리움입니다. 전인이 이 삼걸을 평가할때 “장의 그림은 고기로, 육의 그림은 뼈로, 고의 그림은 신으로; 묘하기 그지 없으나 고가 가장 돌출하다”고 합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개지는 그림을 그릴때 아주 골똘한바 택안에 층루를 화실로 하고 비바람이 불거나 더위와 추움에도 반드시 그림을 그리고 날씨가 게였을 때는 등루(登楼)하여 염색하는데 계단을 옮기어 안해도 보기가 드물다고 합니다.
동진 흥녕(兴宁)2년(364) 소장간(小长干)에 와관사를 지을 때 공사가 너무 커서 스님은 사방에서 돈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오의항에 거주한 고개지는 백만을 희사하기로 하였는데 누구도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사찰이 다 세워진후 고개지는 사찰에 다니었는바 두문불출하고 백일에 걸쳐 대전 서쪽벽에 유마힐거사 상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후 눈을 감빡이며 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는바: “첫 하루에 보는 사람은 10만을 희사하고 이튿날에 보는 사람은 5만을 희사하며 사흩날에 보는 사람은 마음에 내시는 대로 희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문을 여는 그 당시 빛이 사찰을 비추어 시주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다투면서 희사하여 정말로 백만을 얻었습니다. 고개지 그림의 유마힐거사 벽화상은 당나라시기에 죄다 떨어져 소실되었습니다. 당나라후기, 대시인 두보가 금능을 거닐때 전문적으로 진회하 남안의 와관사에 가 고개지의 그림을 흠상하려고 했으나 이때에는 벌써 그림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두보는 듣기에 허팔수유(许八拾遗)처에 와관사 벽화의 모양이 있다고 하여 당장 찾아가 흠상하고: “그림을 보면 기아를 막을수 있는데 보는데는 희망이 묘망하여 유감스럽구나. 호랑이 머리에 김소의 그림자, 묘하기에 오로지 잊을수가 없더라”라고 찬탄에 넘겨 시를 읊었습니다. 시중의 호랑이 머리인 즉 고개지의 별칭인바 김소(金粟)는 법명인데 여기서는 유마힐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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